[전문 심화] 아이는 어떻게 안정감 있는 어른이 되는가







조지 워싱턴 대학의 소아정신과 의사였던 그린스펀 (Stanley I. Greenspan, 1941~2010) 박사는 안정감 있는 아이(The secure Child)라는 책에서 안정형 아이들이 가지는 특징을 다음의 네 가지로 설명한다. 

 

1. 인간관계를 맺고 유지하는 능력

2. 자기가 원하는 바와 느끼는 감정을 잘 표현하고 소통하는 능력

3. 문제 해결 능력

4. 합리적이고 객관적으로 생각하는 능력

 

주애착대상과 안정적인 애착을 형성한 아이들은 대체로 위와 같은 능력들을 갖춘 안정감 있는 아이로 성장한다.  성인이 되어 친밀한 관계를 맺을 확률 역시 높다. 유아의 애착 유형이 성인 애착 유형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어렸을 적 안정형이었던 아이들이라고 모두 안정형 어른이 되는 것이 아니고, 반대로 어렸을 적 불안정형 애착 경험을 한 아이들이라고 모두 불안정한 어른으로 평생을 사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성인 애착 유형은 어떻게 결정되는 것일까? 애착 이론에 따르면 아래의 세 가지가 성인 애착 유형을 결정하는데 영향을 미친다. 



1) 영유아시기에 형성된 내적 작동모델

2) 영유아, 아동기, 청소년기에 겪은 애착 관련 경험들

3) 현재의 애착 관련 경험들


생애 초기 부터 성인이 될 때 까지 친밀한 대상과 맺는 애착 관련 경험이 통합적으로 성인 애착 유형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당연한 소리 같다. 성장기와 현재의 애착 관련 경험들은 굳이 설명을 하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겠지만 내적작동모델을 선뜻 이해하기 어렵다. 어려운 용어지만 알고 보면 쉽고, 우리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개념이니 함께 살펴보자.  


'내.적.작.동.모.델' 

internal working models 


내적작동모델은 말 그대로  개인의 내면(internal)에서 작동하는 (working) 일련의 모델들 (models)이다. 

 

쉽게 말해 개인이 애착대상과 생애 초기에 관계를 맺고 서로를 경험하면서 만들어진 세상과 자신, 타인을 이해하는 규칙.

즉, 자기 자신과, 타인, 세상을 바라보는 틀이다.


여전히 어려운가? 그렇다면 쉽게 이 세 가지 질문을 떠올려보자. 

- 나는 누구인가? (self)

- 타인은 누구인가? (others)

- 세상은 어떤 곳인가? (world)

 

내적 작동모델은 이 세 가지 질문에 대한 내면의 틀인 것이다. 보울비는 내적작동모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각 개인은 세상과 자신에 관해 내적으로 작동하는 모델들을 만든다. 그리고 그 모델들의 도움으로 개인은 사건을 이해하고, 미래를 예측하며, 자신의 계획을 수립한다. Bowlby, 1973, p 203 


세상에 관한 틀 대상표상이라고 하는데 이 작동모델은 누가 그의 애착 대상인지, 어디에서 그 애착대상들을 찾을 수 있는지, 어떻게 그들이 반응할지를 예측한다. 


반면 자신에 관한 틀 자기 표상 이라고 하는데 이 작동모델은 자신이 애착대상들의 눈에 얼마나 받아들여질만한지, 또는 받아들여질 수 없는지 생각한다.


자기 표상과 대상 표상을 섞어서 내적 작동 모델이라고 하고 우리는 이 내적 작동 모델을 통해서 세상을 본다. 이 틀을 통해 저 사람이 어떻게 행동할지 그 행동과 의도를 예측하고, 또 자신에 대해서 예측하고 판단하고, 세상에 대해서 판단하고 예측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도움을 받기 위해 애착대상에게 향할 수 있느냐는 바로 이 두 가지 상호보완적인 모델들, 즉 자기표상과 대상표상 구조에 기인하는데 이 구조는 만 3세, 늦어도 만 5세에 이미 그 형성이 끝난다. 조그만 갓난 아이가 뭘 알겠어? 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인 것이다. 아이는 아주 어릴적 부터 자신만의 내적 작동 모델을 만들고 있다. 그래서 생애 초기의 애착의 경험이 그토록 중요하다고 말을 하는 것이다. (물론 그게 다는 아니지만) 


그렇다면 이 내적 작동 모델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좀 더 살펴보자. 

갓난 아이는 우는 것으로 자신의 감정과 욕구를 표현한다. 예를 들어 배가 고픈 아이는 생존을 위해서 애착 대상을 찾으라는 시그널이 켜진다. 애착 시스템에 레드 라이트가 켜지며 불안정해지는 것이다.  이때 아이가 울어도 반응하지 않거나 비 일관적인 반응을 보이는 양육자를 둔 아이의 내적 작동 모델은 어떻게 형성이 될까. 


아이는 부정적인 내적 작동 모델을 갖는다. 

- 자기에 대한 틀 :  나는 누군가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구나, 난 소중한 사람이 아니구나

- 타인에 대한 틀 : 엄마는 무서워, 엄만 날 싫어해

-세상에 대한 틀 :  세상은 위험하고 믿지 못할 곳이야. 


이렇게 부정적인 내적 작동모델을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아이들의 욕구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못하거나, 짜증이나 화를 자주 낸다거나, 무관심하거나, 혹은 비일관적인 양육을 하는 엄마 밑에서 자란 아이들은 이렇게 부정적인 내적 작동 모델을 가지게 된다. 


 반면, 아기가 울었을 때 엄마가 다가와 젖을 물려주며 따뜻하고 일관적인 반응을 보인다면 아이는 정반대의 내적작동 모델을 만든다.  

- 자기에 대한 틀 : 난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구나

- 타인에 대한 틀 : 엄마는 믿을만한 사람이구나, 엄마는 좋은 사람이구나

- 세상에 대한 틀 : 세상은 재밌고, 믿을만한 곳이야


내적 작동 모델이 형성되는 경향은  분명히 있지만 개인차가 있다.  같은 엄마 밑에서 자란다고 같은 내적 작동 모델을 형성하는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각자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상과 자신을 바라보는 프레임을 만들기 때문이다. 

  

 이 내적 작동모델은 곧 우리가 스스로를 바라보고 타인을 바라보고 세상을 바라보는 이 틀이기 때문에 타인과의 관계를 맺는데 아주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어서 누군가 자신을 보고 웃는 상황을 상상해보자.  어떤 생각이 드는가? 

긍정적인 내적 작동 모델이 있는 사람들은 '어, 저 사람이 나한테 호감이 있나봐' 이렇게 생각하는 반면, 부정적인 내적 작동 모델이 있는 사람들은 '뭐야, 지금 나 비웃은거야? 기분나쁘게 왜 웃어?" 혹은 '내 얼굴에 뭐가 묻었나?' '나 이상한가?' 이렇게 부정적인 쪽으로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의식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나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불쑥불쑥 올라오는 무언가다. 그렇지만 매우 강력하게 우리룰 움직이는 힘인 것이다. 

 

안타깝지만 이 내적 작동 모델은 잘 안변하지 않는다. 애착 이론을 창시한 보울비는 한번 형성된 내적 작동 모델은 웬만해서는 변하지 않으며 나이가 들면서 정교해지고 단단해지는 경향이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대물림 될 확률도 높다. 영국에서 행해진 포나기와 스틸의(fonagy, steel, & steel , 1991) 애착의 대물림 연구에서는 100명의 임산부 엄마들을 대상으로 애착 유형을 측정해보았다. 그리고 자녀가 출생한 후 1년이 지나고 이 아이들의 애착 유형을 살펴보니 놀랍게도 아이를 낳기 전 엄마의 내적 작동모델과 태어난 아이의 내적 작동 모델이 일치할 확률이 75%에 이르렀다. 

 

비노이트와 파커(benoit, & parker, 19940)는 3세대에 걸친 애착 유형에 대한 연구 결과 할머니, 딸, 손자, 손녀, 이렇게 3대에 걸쳐 애착의 대물림이 일어난다고 발표했다. 다시말해 내적 작동모델은 잘 변하지도 않을뿐더러 그냥 있으면 대물림이 될 확률이 굉장히 높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신의 부정적인 내적작동 모델이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고 대물림을 끊고 싶다면 무의식적으로 반응하는 것에서 벗어나 의식적인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이다. 유아기, 아동기, 청소년기의 애착 경험들은 이미 지나갔다. 중요한 건 지금 현재 애착 관련 경험들. 즉, 나의 연인이나 배우자와 애착의 경험을 잘 쌓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쉬운 것은 아니다. 

하지만 노력할 가치는 충분히 있다.  

 

나와 상대방이 어떤 내적 작동 모델을 형성하면서 자랐는지 어떤 프레임으로 자기 자신과 타인,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지 알게 되면 관계를 맺는데 있어서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공간이 생긴다. 부정적인 내적 작동 모델을 가진 것이 우리 탓은 아니지 않은가. 우리도 어쩔 수 없는 아주 어린 시절에 이미 형성된 것이다. 

 

그러니 ‘내가 사람을 잘못골랐어’라는 ‘안정형을 만났어야 하는데’ 라는 비관적인 사고보다는'그 사람도 어쩔 수 없었겠다' 라는 연민을 마음을 갖는 것이 관계에는 도움이 된다. 

상대방도 어쩔 수 없는 감정의 변화가 있을 수 있다는 걸 이해해보는 것이다. 그게 어쩌면 생애 아주 초기에 자신도 스스로를 어찌할 수 없을 때 만들어진 프레임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행인 건 최근의 연구들이 굉장히 희망적이라는 점이다. 유아 시기에 만들어진 내적 작동모델을 바꾸지 않더라도 삶의 다양한 경험들에 의해서 애착 유형이 변할 수도 있다는 걸 증명해주고 있다. 어린 시절이 힘들었다해도 현재 연인이나 배우자와 정서적인 친밀감을 잘 나누면 안정형 애착으로 변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미 어른이 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건 우리의 과거가 어떠했는냐보다 지금 내가 사랑을 나누고 있는 사람과 얼마나 안정적인 애착 경험을 하고 있느냐다.